링크(21세기를지배하는네트워크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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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A. L. 바라바시 (동아시아,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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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현재 사회과학영역부터 자연과학의 영역까지 광범위하게 큰 관심을 끄는 학문이 있다. 바로 복잡계 과학Complex System Science)이다. 이 새로이 주목 받는 복잡계는 복잡한 사회 현상 및 자연현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도구로서 자리 굳힘 하고 있다. ‘링크는 복잡계 이론의 대중 교양서로서 이 이론의 학문의 영역에서의 가능한 역할과, 우리 삶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소개하고 있다.

복잡계 이론의 창시자이자 권위자인 책의 저자 바리바시는 척도 없는 모델(scale-free model)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복잡한 네트워크의 역학을 설명한다. 이 척도 없는 모델에서 중요한 가정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첫 째는 노드(nod) 간의 연결이 무작위적으로 연결 되는 것이 아니라, 선호적 연결이 반영되어 네트워크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네트워크가 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종형 그래프가 아닌 멱함수 법칙을 따르는 현상들은 대부분 이 모델로 설명될 수 있다.


  척도 없는 네트워크는 장점이자 약점이 되는 특징이 하나 있다. 바로 수많은 노드들과 링크들로 이루어진 네트워크에서, 극히 일부의 노드가 수많은 링크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노드들이 제거되었을 때, 네트워크의 기능이 큰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작동을 할 수 있도록 한다. 또 노드 간의 거리를 좁혀주므로 네트워크의 효율을 높여준다. 하지만 수많은 링크들을 가진 허브역할의 노드들이 하나 이상 제거되면 네트워크의 기능이 축소되거나, 붕괴된다는 큰 문제가 있다. 네트워크의 붕괴를 노리는 입장에서 보면 공격의 대상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개념과 특징들을 가진 복잡계 네트워크 이론은 어떻게 분자생물학과 연관이 될 수 있을까?

 

2. 적용

오랫동안 생물관련 전공에서 주로 진행되어 왔던 연구는, 생물을 구성하는 크고 작은 요소들을발견하는 데 있었다. 하지만 미시적인 단위에서의 발견이 크게 진척된 것에 비해서, 발견된 것들의 기능을 알아가는 것은 점차 어려워졌다. 왜냐 하면 그들이 우리 몸에서 1:1 혹은 일 대 소수의 관계로써 기능을 발휘하기 보다는, 여러 다른 단백질 등의 분자들과 복잡한 상호관계 속에서 기능을 가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과거 학자들은 서로 다른 생물학적 현상에서 같은 분자가 관여된 것을 발견하곤 자주 당혹해 했다. 하나의 대상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는 방법으로는, 그 것의 역할을 더 이상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연구 도구가 되어준 것이, 복잡계 네트워크 이론이다. 이제 생물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나무뿐만 아니라 나무가 속한 숲의 모습을 조망할 수 있어야 한다. 복잡계 네트워크 이론은 그런 시야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수 많은 대사물들의 연쇄 반응 들은 선형적이거나 일방적인 흐름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대사물들이 이루는 하나의 네트워크 안에서 나타나는 흐름의 일부분일 뿐이다.


 이렇게 생물현상을 발현하는 네트워크 역시 멱함수 법칙을 따른다. 즉 척도 없는 모델로 설명 할 수 있는 네트워크이며, 우리는 그 안에서 허브역할을 하는 물질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유전자가 될 수도 있고, 단백질이 될 수 도 있다. 그 허브 물질은 여러 생명현상에서 각각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허브 물질을 중심으로, 혹은 특정 물질이 허브와 가지는 관계를 중심으로 연구하는 것이 대사 네트워크의 전체적인 모습에 다가가는 길이라 생각한다.

 

3.소감

이러한 생물 대사 네트워크를 규명하려면 생물학적 지식 뿐만 아니라 통계학과 컴퓨터에도 능통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링크에서 저자가 광활한 웹공간을 대상으로 척도없는 네트워크 모델을 연구하였듯이, 우리가 상대하는 네트워크 역시 만만치 않게 복잡하고, 규모도 거대하다. 즉 각각의 노드를 하나의 대사물질로 생각을 한다면 수없이 많은 노드들이 이루는 광대한 네트워크를 상상할 수 있다. 이런 네트워크를 파악하는 것은 인터넷 공간에 여러 대의 로봇을 굴리듯이 할 수 없다. 수많은 사람들의 연구결과들을 종합하여 컴퓨터와 통계 지식으로 체계화 할 수 있는 전문화된 인력이 필요한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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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문 물리학에서 이야기하는 빅뱅은 무엇을 말하며 무슨 현미경의 발달로 가능하게 되었는가? 많은 기초 물리학자들은 우주가 무엇으로 시작했다는데 대하여 동의를 하는가?

처음에 우주가 무한하며 정적이라는 생각이, 우주가 중력에 무너지지 않고 안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과 모순됨이 알려지면서,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우주가 팽창한다는 개념이 등장하였다. 그런데 우주가 팽창한다는 것은 시간을 거꾸로 되돌렸을 때, 우주가 한 덩어리에서 팽창을 시작한 시점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빅뱅 이론이라고 불린다.

과학자들은 광학현미경을 통한 관찰과 도플러 효과를 이용하여 우주가 팽창하는 것을 알아내기도 하였고, 또 전파망원경을 통해 대폭발 때 물질과 반물질이 소멸되면서, 온 우주에 골고루 흩어진 우주 잡음을 발견하여 빅뱅 이론을 증명 할 수 있었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발견들로 우주가 무한에 가까운 고밀도에 크기도 없는 순수한 에너지로 시작했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2. 미국의 인간유전체 사업단장 이었던 플랜시스 콜린스 박사의 성장 배경 및 약력에 대하여 간단히 조사 설명하시오

콜린스 박사는 버지니아의 시골 농장에서 제도권 교육을 받지 않고, 영어학자였던 아버지와 극작가였던 어머니로부터 홈스쿨링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의 부모님의 교육 방식은 아이들의 공부에 대한 흥미를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 것이어서, 훗날 콜린스가 학업에서 큰 성과를 얻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과학적 탐구 방법에 매력을 느끼고 물리화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물리화학으로 박사 과정에 있던 중 생물학으로 돌연 관심을 돌려 의학을 전공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의사로서 또 생물학자로서 DNA와 유전에 대하여 연구를 지속하였고 최근에는 초국적이고 역사에 큰 업적이 될 인간게놈프로젝트의 총 지휘를 맡아 성공리에 프로젝트를 종료했다.

그는 신앙과는 거리가 먼 가족환경에서 자랐던 것도 있겠지만, 대학교 때 신의 존재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는 것을 회피하면서 스스로 불가지론자의 입장을 자처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물리화학을 깊게 공부하게 되면서, 자연현상 속에 깊이 내재한 수학적 진실에 점점 무신론자로서의 입장을 굳혀갔다. 그러나 그가 의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수련의로 있을 무렵, 그동안 미뤄 놓았던 신의 존재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다시 시작하게 되는 계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는 신의 필연적 존재에 대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동안 자신이 추구한 과학적 진실과 종교적 진실이 얼마든지 접점을 이루고 조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비록 생물학자로서 진화와, 유전 등 얼핏 보면 신앙과 배타적이 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새로운 지식을 얻었지만, 이런 과학적 발견들은 그가 신에 의해 만들어진 질서에 대해 더욱 더 경외감을 가지게 하고 신앙심을 굳히는 계기로 삼았다. 지금 그는 종교와 과학이 양 극단에서 서로 대립하기만을 고집할 때, 그 둘 사이의 접점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3.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이 있는 철학자로 꼽히는 임마누엘 칸트가 자신을 끊임없는 존경심과 경외감으로 가득 채우는 게 2가지 있다고 하였는데 그 2가지는 무었인가?

칸트는 밖으로는 별이 총총한 하늘이, 안으로는 도덕법이 자신을 존경심과 경외감으로 가득 채운다고 하였다.

4. 인간사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고 인정되는 양심을 진화론적 부산물, 즉 진화에 의하여 생겨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진화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양심을 진화론적 부산물로 본다는 것은, 이타주의적인 행동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인 방법으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결국 진화적 압력이 발생하여 내재화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실제로 호혜적 이타주의가 개체의 이익으로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고, 대가성이 전혀 없는데 발생하는 많은 양심적인 행동들이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5.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은 인간의 타고난 특징일까. 아니면 문화적 전통의 결과일까?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콜린스 박사의 주장에 근거하여 설명하시오.

콜린스는 옳고 그름은 인간의 타고난 특성이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세상엔 인간에 내재한 실천이성을 공통적으로 지지하는 수많은 예들이 있다고 한다. 비록 여러 가지 다양한 문화권에서 동일한 도덕률을 발견할 수 있지만, 이들이 어떻게 적용되느냐에 따라서 그 외형적인 모습은 판이하게 다를 수가 있다. 이렇게 인간들의 사회를 관통하는 공통된 도덕법이 있다는 주장은, 포스트모더니즘과 정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비판받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인 옳고 그름 대신 윤리적인 판단의 상대성을 강조하는 철학이다. 하지만 이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인 진실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 자체의 진실성도 훼손시키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콜린스는 인간 선악 판단의 기준이 이미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다는 쪽에 더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6. 우리 인간의 행동 양식을 관장하는 특정한 유전자는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무엇이고 존재하지 않는다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인간의 행동 양식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는 여러 가지가 이미 발견되었다. 예를 들면 세로토닌 전달체 형성에 관여하는 유전자가 있고 이는 한 사람의 스트레스와, 불안감의 정도에 영향을 준다. 그 외에도 유전자가 인간의 행동양식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정말 많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유전자가 프로그램한 그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주위 성장 환경에 따라 그 성향이 뚜렷하게 정해지며, 비교적 행동양식을 강하게 정한다고 알려진 유전자도 그 영향이 환경적인 요인의 그것과 비등하다. 우리는 유전자가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영역에서 과장된 영향력을 가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고유의 행동양식을 지정하는 유전자를 가질지 모르나, 그것들을 발현을 결정하는 것은 자신 스스로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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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야산다
카테고리 과학 > 교양과학
지은이 샤론 모알렘 (김영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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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인 제목에서 의문점을 갖는다. 아프다는 것은 죽음과 가까워 지는 것인데, 어떻게 아프길래 산다는 것일까? 저자는 후생유전학자로서 질병을 유전적, 진화적 측면에서 통념과는 다른 방법으로 바라봄으로 질문에 대한 답을 준다.

모든 생물은 환경의 변화에 따른 진화적 압력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압력에 따라 유리한 형질을 가진 개체는 존속하고, 그렇지 못한 개체들은 자손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진다. 이 진화의 갈림길에서 생물은 일종의 '선택'을 하게 되는데, 이 선택은 생존에 유리함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방법으로 생존에 위협을 가하곤 한다.

저자는 우리가 벗어나고 싶어하는 많은 질병들이 실은 이런 생존을 위한 선택에 따른 결과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말라리아 같은 전염병이 유행하는 아프리카의 사람들이 말라리아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선택을 했는지 볼 수 있다. 말라리아는 모기가 사람을 물었을 때, 사람의 핏 속으로 들어가 적혈구에서 번식을 한다. 그리고 수많은 유충들이 적혈구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면서 사람은 심한 고열증상을 나타나게 되며 심하면 생명이 위험하게 된다. 그리고 병을 앓는 사람의 피를 모기가 물어 여기저기 옮겨다니면서 전염병의 모습을 띄도록 한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처음에는 속수무책으로 말라리에 당했지만, 낫모양처럼 생겨 비정상적인 적혈구를 가진 사람들이 살아남기 시작했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비정상적인 적혈구를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말라리아 유충이 제대로 살 수 없는 적혈구를 만드는 유전자를 선택해서 심각한 생존의 위협을 피해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형 적혈구로 인한 질병은 피해갈 수 가 없었다. 

이것이 저자가 보는 우리의 질병의 실체이다. 겸형적혈구 외에도 당뇨병, 혈색증, 알콜가수분해효소결핍증 등등이 모두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인간의 선택에서 유래한 부산물인 것이다. 아마 이런 질병들이 왜 생겼는지 아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지는 헷갈릴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질병이 끔찍한 재앙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도록 해 준 것 같다. 그동안 우리는 생존에 유리한 형질을 선택하면서  진행되는 진화에 질병이 왜 끼어 들었는지 궁금해 왔지만, 이제 이 질병들이 지금 우리가 존속하게 하는 요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질병을 일으키는 유전자가 어떻게 존속해 왔는지만 말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 인간이 어떻게 그 유전자를 획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준다. 흔히 유전자에 각인된 형질은 운명이고 번식 과정에서 흔히 일어나는 돌연변이와 유전자의 섞임에 의해 새로운 형질을 얻어간다고 (대충 설명하면) 믿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자그마한 변화에 의지하여 생물이 생존하기에는 세상의 환경이 너무나 빠르게 변했고, 급격한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빠른 진화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거스를 수 없을 줄 알았던 유전자는, 우리 몸의 환경에 따라서 얼마든지 억제되거나 변형될 수 있고, 그 영향이 세대를 이어갈 수 있다고 한다. 믿기 힘들지만 이 책은 이 놀라우면서 충격적인 이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을 가지고 우리의 통념을 뒤흔들어 놓는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세 가지를 배웠는데, 첫 번째로 질병을 진화의 실패로만 편협하게 바라보다가 인간을 지금까지 거친 환경변화에서 생존케 한 장본인임을 알게 되었다. 

두 번째로, 진화는 생각보다 신속하고 빠르게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지금 당장의 노력을 통해서 유전자의 굴레에서 어느정도 벗어날 수 있으며, 그 영향은 후손에도 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라마르크의 '획득형질유전' 을 다시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리 두껍지 않은 책에서 너무나 큰 영향을 받아버렸다. 어쩌면 진로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까 싶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토피를 앓았기 때문에, 아토피와 관련해서 모든 생물학적인 지식을 연관시키는 버릇이 있다. 내 병을 더욱 더 잘 알고, 고치고 싶은 열망은 내가 생물학을 공부하게 만들었고, 내 생각에는 평생 연구 주제의 한 중심 흐름으로 잡을 것 같다. 그러나 학부생으로서 나는 정작 내 병을 수많은 생물학의 분과들 사이에서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할 지는 막막하던 차였다. 그런데 이 책을 접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분야가 후생유전학이었다. 책의 말을 빌리자면 이 학문은 처음부터 '획득형질유전'을 다루고 있다고 하는데, 곧 그 말은 후생유전학을 통해서 내가 앓는 이 유전질병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방법과, 지금 당장 질병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정말 후생유전학을 공부하게 된다면, 미래를 보여준 이 책을 가보로 삼을지도 모르겠다.

걸음마 수준인 진화와 유전의 학문에서, 새롭게 발견될 놀라운 지식들은 과연 어떤 것일까? 질병을 보는 새로운 시각에서 사람들은 기존과는 다른 방향의 치료법을 발견할까? 우리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변화해 갈까? 

어느 때보다 어려운 질문들과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을 남기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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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거짓말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김려령 (창비,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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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랜만에 읽는 소설이다. 정보에 목마르다 보니, 소설을 통한 간접 경험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가지기 어려웠다. 그러다 어느날 두께도 적당하고, 제목에서 풍겨오는 이 책의 섬뜩함에 끌려 첫장을 넘겼고, 바로 끝장을 향해 쉼없이 달려가게 되었다.

"내일을 준비하던 천지가, 오늘 죽었다."

중학생 두 남매와 어머니가 밥상에서 티격티격 하는 여느 평범한 집의 아침 풍경으로 시작하는 듯 하던 내용은, 바로 두번 째 페이지에서 동생의 죽음으로 기습을 날린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동생 천지는 왜 죽었을까? 언니 만지와 엄마는 그녀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러나 그 죽음이 주는 선명함에 가슴아파한다. 그래서 언니 만지는 동생의 죽음 이면에 있는 사실을 파해치기 시작하고, 동생 주위의 인물들로부터 퍼즐을 하나씩 찾아나간다.
절친이라고 여겼던 화연, 천지에게 어느 정도 관심을 보였던 미라, 천지를 알고 있던 옆집 백수 아저씨...  이들은 천지가 스스로 짧은 삶을 선택하게 된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


비밀 하나. - 화연

천지네는 경제적으로 어렵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 혼자 두 자매를 키우고 있고, 여러 집을 전전하면서 힘든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일까 천지는 소극적이고 학교에서 도무지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아이이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공부를 못하지도 않고 잘하지도 않는 중위권에 머무르면서 스스로를 숨기고 또 숨겼다.  
이랬던 천지에게 먼저 다가온 아이는 화연이었다. 그러나 결코 좋은 의도에서 다가온 것은 아니었다. 천지와 의도적으로 가까워진 다음 천지에게 친근한 듯 행동하며 그녀의 유일한 친구임을 내세웠지만, 이 관계는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였다. 여러 친구들에게 온갖 좋은 것들을 해주며 다가가서는, 천지의 험담과 거짓 소문을 공유하면서 친해지려 하는 것이 화연이의 진짜 모습이었다.

천지는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그저 아웃사이더였다. 하지만 화연은 그저 혼자 있을 뿐이엇던 천지를 은따(은근한 따돌림) 혹은 왕따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장본인이었다. 이것이 천지를 벼랑으로 몰아갔던 실체의 비밀 하나.


비밀 둘. - 엄마와 만지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천지네는 그렇게 살갑고 정넘치고 화목한 가정과는 거리가 멀다. 되려 경제적인 공백을 메꾸기 위해 낮밤으로 일하기 바쁜 어머니는, 민감한 사춘기 시기의 자매에게 정서적인 의지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일까? 억척스럽고 성격이 센 엄마와 언니는 소극적이고 세심한 성격의 천지와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어울리지 못했던 것 같다.

책의 중간에 천지의 나레이션이 있다. 가족들이 천지의 평소와 다른 언행과 행동마저 지나쳐버린 후.
"내가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그만 떠나야 했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천지를 보이지 않는 아이로 만든 것은 가족이었던 것이지 않을까? 안타까운 비밀 둘.


비밀 셋. - 미라

미라는 책에 등장하는 두 가정의 지저분한 관계의 중간에 있는 인물이다. 천지 어머니와 애인 관계에 있던 남자의 딸로, 천지가 아버지의 애인인 것을 알고는 천지를 탐탁치 않게 본다. 물론 그녀는 탕자였던 아버지를 더욱 싫어하지만, 이유가 분명치 않은 감정은 천지를 미워하게만 만든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직접적으로 천지에게 표출되지 않고, 복잡한 상황들과 맞물려서 나타나고 만다.

평소에 미라는 천지를 의도적으로 괴롭히는 화연의 모습을 보면서 매우 역겨워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괴롭힘을 곧이 곧대로 받고도 계속 같이 지내는 천지가 이해되지 않앗고, 또 자신의 아버지로 얽힌 천지와의 관계때문에, 연민보다는 한심함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어느날 미라는 천지에게 화연의 본 모습을 명확히 각인시켜주지만 이는 그녀에게 어쩌면 화연의 괴롭힘보다 더 가혹할 수 있는 일이었다. 화연의 행동은 항상 같이 있는 천지가 더 잘 아는 법이었다. 천지는 이 모든 것을 감내하고 있었고, 상처받고 있었지만 아물게 하면서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미라가 화연의 모습을 다시금 천지에게 확인시켜주면서, 천지의 상처를 날카롭게 파고든 것이었다.

화연이 천지를 벼랑으로 몰았지만, 그녀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린 것은 미라의 순수하지 않은 천지에 대한 관심.


비밀 넷. - 옆집 백수 아저씨

아저씨는 천지와 도서관에서 종종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다. 천지의 죽음의 비밀을 캐내던 만지는, 이 사람으로부터 그녀가 천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아저씨는 자신이 천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에, 그녀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천지가 아저씨에게 보인 모습은 천지가 낯선 이를 경계하기 위한 가면을 쓴 모습이었을 뿐이다. 

"당신은 날 아는게 결코 아니야"  -천지-
 천지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는 제 3자의 오만함.





이 네가지 비밀들은 나이게 너무나 소름끼치게 공감을 강요하며 다가왔다. 천지의 모습에서 나의 외로움을 보았고, 주위 인물들에게 천지가 받던 폭력의 실체가 투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외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위안을 얻고 존재감을 얻곤 하지만 개중에는 나와 같이 외로우면서도 혼자로 자주 회귀하는 돌연변이가 있다. 이런 돌연변이들에게 이 세상은 너무나 가혹하다.

돌연변이로서 가장 아프게 다가온 것은 미라가 천지에게 했던 것과 같은 행동이었다. 너무나 아픈 사람에게 진심이 담기지 않고 겉치레거나 불순한 의도가 담긴 관심은 없으니만 못하다. 책임지지도 못하는 관심은 호기심에 남의 상처를 드러내보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화연이와 같은 직접적이고 가장 많은 상처를 준 것들이 잘못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피해자들은 이런 직접적인 가해자들만으로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리지 않는 다는 것이다.

우리는 따돌림 문제를 바라볼때 매우 다양하게 접근을 해야 한다. 화연이 뿐만 아니라 무관심한 가족들, 거짓된 관심의 미라, 착각하는 아저씨 , 이 모두를 함께 바라보아야 한다. 사람대 사람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왕따 문제인 만큼 어느 누구도 용의선상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간혹 왕따로 인해 고통받는 아이들 문제를 볼 때, 사람들이 직접적인 가해자들에게만 집중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숨길 수가 없다. 이것 또한 미라와 같은 거짓된 관심일 뿐이고, 피해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깊이 공감하고 마음 속 자리잡은 상처를 어루만져줄 수 있는 진심 섞인 관심이다.


지금부터 시작이야. 마지막 털실 뭉치를 찾을 때까지……. ― 언니 만지 

삶을 일찍 마무리한 천지는 용서한다는 편지를 숨겨 놓은 털뭉치를 죽기전에 사람들에게 주었다. 용서받은 만지와 사람들은 아마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애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도 우리의 세상에는 모든 것을 자신이 떠 안으며, 용서를 담은 털실뭉치를 짜고 있을 사람들에게 "잘 지내나요?" 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 기회를 더이상 놓지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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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희연 2011.08.24 11:39

    이 소설을 읽고 진짜 느끼신게 많은 거 같네요~~
    깊이 있는 리뷰 잘읽었습니다.
    따돌림 문제를 바라볼 때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말에
    공감이 가네요.
    직접적으로 따돌림 시킨 가해자들 외에 방관한 사람들 역시 제2의 가해자이니까요

                                                        

  이 세상을 설명하는 이론은 심리학부터 경제학에 이르기까지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무궁무진하다. 인간의 모든 세상속 일들을 과학적으로 일반화 시킨 다음 이해 및 적용시려는 노력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은 너무나 거대한 복잡성 앞에서 오류를 노출시키면서 세상을 설명하는데에 좌절하고 만다. 수 많은 경제학 이론들이 매년 쏟아져 나오지만, 그 어느 경제학자들도 갑자기 찾아와 온 세계를 혼란에 빠뜨리는 불황을 예상하지 못한다.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금융대란 같은 매우 희박한 확률로 일어나야 할 일들이 실제로는 매우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의 예측이 그들이 구축한 이론과 엇나가는 이유는 일맥상통하다. 바로 우리가 너무 작은 부분에 집착하고 이 작은것에 대한 이해로 작은 것들이 얽혀져 복잡한 관계를 가지는 큰 것을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탄소의 원자의 구조와, 구성 입자들의 특징을 밝혀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부터 탄소나노튜브 분자를 발명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탄소나노튜브는 분자단위 연구를 통해 얻어진 결과이다) 
즉 우리가 인간사회 현상을 이해하는데 성공하려면, 인간의 습성 하나하나를 자세하게 연구하는게 아니라, 여러 인간들이 모여서 이루는 집단의 역학을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고 인간 집단의 역학을 이해한다면, 개별적이고 독특한 대상으로여지던 사회 현상들이 실제로는 일반적인 패턴을 가진 뚜렷한 흐름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적 원자>는 인간을 사회를 구성하는 원자로 보기 때문에, '사회적 원자'라고 본다. 사회 안에서 인간들의 행동은 거시적으로 바라볼 경우 일정한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치 전자기적 인력에 의해 분자안에서 행동하는 원자처럼) 그래서 글쓴이는 기존의 사회 현상을 설명하던 방식을 거부하고, 사회과학에 물리학을 접목시킴으로서 놀랍도록 참신한 방법으로 지금까지 설명하기 위한 시도조차 어려웠던 우리네 일들을 명쾌하게 풀어준다. 

                                                


  사람들은 생각 외로 명확한 이성으로 행동하지 않고, 진화적으로 생존에 유리하였던 행동을 따라서 한다고 한다. 그 중 가장 인간의 생존에 큰 영향을 미쳤던 행동 양식은 '강한 호혜주의'라고 한다. 이 강한 호혜주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유익한 행동을 함으로서 둘 모두의 이익이 극대화 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바로 협력하는 방식으로 더 큰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인간의 특징은, 바로 모방하는 능력이다. 인간은 다른 개체의 성공적인 생존전략을 모방하는데 탁월하며, 이 모방은 유사한 특징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협력을 할 수 있게끔 하는 재료가 된다. 이런 모방과 협력은 인간이 사회를 이루게끔 인도한다. 

  하지만 환경은(인간으로부터 받는 영향도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항상 변하고, 사람들의 생존전략 역시 시시각각 변하기 마련이다. 이런 사소한 변화는 사람들의 모방과 협력을 유발하면서 새로운 사회 형성의 흐름을 낳게 되는데 아마도 시간이 지나 또 다른 변화가 생긴다면, 역시 새로운 흐름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의 사회만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작은 단위의 그룹부터 국가단위의 사회까지 수많은 방법으로 뭉쳐져 있고 각각의 사회는 서로 이해와 가치를 놓고 대립을 하고 있기 때문에 '흐름'은 작은 흐름부터 큰 흐름까지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다. 이런 마트로시카 인형처럼 혹은 프랙탈도형 처럼 복잡한 '계' 들 속에서 어느 현상의 단순한 인과로 합리적인 예측을 얻는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사람들은 이 계들의 생성과 성장, 분열의 흐름을 관찰하여야 보다 더 합리적인 예측을 할 수 있다.

                 
                              

  나는 이 책에서 제시한 방법으로 한국에 존재하는 흐름을 파악해보고 싶다.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이 흐름적으로 자연스러운 과정중 하나라면, 미래에 한국이 가야할 방향은 어디이며 그 미래를 확신했을 때 어떤 준비를 해야하는지 알고 싶다. 지금 우리는 지역감정으로 나뉘고, 부자와 빈민이 대립하고, 이념으로 갈라서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분명히 이런 대립의 구도에서 우세한 세력은 약해질 것이고, 약했던 세력은 흐름을 타고 대세로 자리잡는 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끊임없이 반복되기도 할 것이다. 아마도 역사가 순환한다는 말은 이런 흐름을 포착함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만약 단순한 순환만 있다면 지금 우리 삶의 모습은 정말 예전과는 다름이 없을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면서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모방을 지향하기 때문에, 꾸준한 발전을 이루고 있다. 그런 모습을 그래프로 그리면 아래 그림과 같지 않을까?  나는 우리나라 역시 어느 순간 모든 것이 퇴보하는 듯한 상황이 있겠지만 이런 순환변동을 하면서 꾸준히 발전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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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iceWhat'stheRightThingtoDo?
카테고리 인문/사회 > 철학 > 일반
지은이 Sandel, Michael J. (FarrarStraus&Giroux,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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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때보다도 ‘정의’를 갈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있는 요즘이다. 대통령은 ‘공정’을 앞세워 국민들의 공감을 유도하고 있지만, 정작 사회에서는 ‘공정’도 ‘정의’도 찾기 힘들어 보인다.  기업과 노동자, 학생들과 대학교, 부자들과 서민들, 정부와 국민, 그리고 국가와 국가 등등 모든 개인 혹은 집단 간의 갈등에서, 양 쪽 모두 정의를 외친다. 그러나 정의를 외치는 그들의 목소리는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가치 안에서 통합되지 않고 더욱 더 날을 세우고 서로에게 덤벼든다.


 우리는 실제로 정의를 배운 적이 없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배우지 않았다. 다만 개별적인 행동양식들을 교과서나 가르침을 통해 배웠고, 이 행동들이 ‘올바른 것’ 으로 강요받았다. 아마도 우리는 어느새 우리가 강요받은 이 행동양식들을 반성하는 과정 없이 ‘정의’라고 부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들이 왜 옳은지, 또는 어떤 일련의 사고를 통해 이 행동의 가치들이 옳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잘 알지 못한다. 이런 무지한 우리가 수많은 가치가 대립하는 다원화 사회에서 과연 ‘정의’를 찾을 수 있을까?


 샌들 교수의 책은 이런 무지한 우리에게 “정의란 이런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 보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의 기준이 어디서부터 발전해왔는지 밝혀준다. (그래서일까 책에는 "shed light on" 이라는 표현이 많이 쓰인다.) 아마도 제목만으로 책을 골랐던 독자들은 “정의”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받기를 원했다가, 철학 교양서 같은 내용에 약간 병렬적인 내용구조로 많이 아쉬웠을 수도 있다.(심지어 마무리가 없기도 하다) 하지만 만약 이 책이 ‘정의’를 명확하게  제시하였다면, 샌들 교수는 주교가 되고, 책은 성경이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은, 징병제, 세금 징수, 대리모, 복지, 역사적 잘못에 대한 사과, 등등 수많은 사례를 통해서 정의를 설명하려 했던 철학자들의 개념을 소개하고, 또 그것들의 한계를 말해준다. 소개된 개념들은 다음과 같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두는 공리주의,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들은 어떠한 것들로부터도 침해받을 수 없다는 자유지상주의,

도덕적인 행동은 자율적인 주체가 설정한 도덕적인 동기로부터 나온다는 칸트의 도덕론,

우연에 의해 얻은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며 일부 이익을 재능이 없는 자에게 나누어 주는 롤즈의 차등원칙

어떤 것이 그것의 목적에 가장 적합한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


 그리고 이 개념들을 뼈대로 수많은 딜레마들이 연속적으로 제기 된다. 예를 들어 자유지상주의를 소개를 하며, 세금징수의 문제가 나오는데, 세금을 걷는 것이 소유의 권리에 침해를 가하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가능하다. 하지만 징수는 합법정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합법이란 의미는 자율적인 주체자들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책은 이제 다시 자율적인 주체자들의 합의의 가능성을 딜레마를 통해 점검해본다.


 수많은 가치가 충돌하는 다원적인 사회에서 어느 하나의 가치에 의존하기는 힘들다. 끊임 없는 성찰과, 토론을 통해서 각각의 접점을 도출해 내는 과정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 정의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정의가 실현되려면 ‘존중’이란 것이 있어야 한다. 존중 없이는 다양한 가치의 반영물들을 경청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토론문화의 성숙함은 여기서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우리나라를 돌아보면 많은 점이 개선되어야 함을 느낀다. 거친 충돌은 있지만,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없다. 토론은 있지만 경청하진 않는다. 혹 이런 성숙되지 않은 토론문화가 정치 환경에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더 정의에 목말라 하고, 찾기 위해 샌들 교수의 책을 읽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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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07.13 23:48

    진규야 어려운 책 리뷰를 쉽게 잘썼네~^^ 이렇게 생각을 많이 요하는 책을 읽고 이성의 날을 세우는 거 정말 훌륭해보인다~! 형도 이책 읽었었는데 울림이 큰 책이었어~ 사실 혼자 읽기 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얘기 나누고픈 책이라고나 할까~

호감의법칙0.1초에결정되는당신의매력
카테고리 자기계발 > 화술/협상 > 대화와화술
지은이 프랑크 나우만 (그책,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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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의 '처세술' 코너에 가면 공통적으로 책들이 다루는 주제는, 남들에게 어떻게 하면 매력적으로 보이는가 하는 것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이 방법에 대해 연구를 하였고, 다양한 관점에서 쓰여진 많은 책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와 같은 책들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인기를 누리는 것은, 그만큼 사회에서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중요한 가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능력이 아무리 출중한 사람이라도, 주위에 사람이 없다면, 그 사람은 능력을 충분히 활용을 할 수 조차 없다. 오히려 능력이 조금 부족하지만, 그 부족한 능력치를 주변 인맥을 통해서 보충할 수 있는 자를 모든 조직에서 원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을 단순히 만나다고 해서 서로에게 바람직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 스스로가 사람들에게 호감가는 인상을 가지고 있어야, 상대가 나를 받아들이고, 도움을 요청하거나 혹은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무나 호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고민을 던지고 있으며, 이런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처세술 관련 책들이 베스트 셀러 진열대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 중에서도 <호감의 법칙> 은, 상대방이 나를 바라보는 짦은 시간 내에 정해지는 나에 대한 인상을 긍정적으로 이끌기 위한 행동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CHAPTER 1. 인간관계의 룰을 180° 바꾸는 호감의 심리학
CHAPTER 2. 호감과 비호감은 성격에서 나온다
CHAPTER 3. 이미지가 당신의 모든 것이다
CHAPTER 4. 첫인상을 결정하는 스타일의 힘
CHAPTER 5. 인맥의 지도를 펼쳐라
CHAPTER 6. 친구로 만드는 말, 적으로 돌리는 말
CHAPTER 7.직장에서 쉽게 성공하는 진짜 이유

앞의 세 장에서는, 호감있는 사람과 비호감인 사람들의 특징을 분석하면서, 그 호감의 실체가 무엇인지 밝혀준다. 그리고 호감형이거나 비호감형 인물이 되는 이유를 성격에서 찾고, 이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을 큰 관점에서 제시를 한다. 또 자신이 비호감인 지 호감형인지 알아볼 수 있는 간단한 테스트가 준비되어 있다. 그 밖의 장에서는 옷을 입는 스타일, 듣기 좋은 목소리, 사람과 인연을 쌓는 방법, 화법, 리더쉽등 다양한 영역에서 호감형이 되기 위한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책 후반에 제시하는 이런 방법들은 언제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남들은 이 책의 가장 도움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이 책에서 '호감'을 짦게 설명하는 부분에서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을 발견하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기에 앞서 나를 먼저 분석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상대방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 신경을 굉장히 쓴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피부병으로 대인관계에 신경을 쓰지 못하였고, 대학에 들어왔을 때에는, 상대방의 눈을 마주보고 대화하는 것 조차 너무나 힘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차근차근 어린아이 마냥 배워왔고, 지금은 그나마 조금 나아진 상태이다. 여전히 대화를 할 때 어떤 주제로, 어떻게 참여해야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한다. 게다가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쉽게 알 수가 없으니 항상 답답해 하고, 조심스럽고 소심하게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행동들이 벽을 치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도 한단다. 어느날 기회가 닿아 친구한테 나의 첫인상을 물었더니, 표현 단어들이 가관이다. '무섭다' '지적이다' '있어보인다' '다가가기 어렵다'.. 대체로 비호감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나왔는데,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사람과 인연을 트는데 만성적인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래서 그 때부터 나 자신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시간내어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나를 특징 짓는 중요한 몇가지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1. 나를 부정한다; 나를 항상 남들보다 부족한 존재로 보기 때문에, 언제나 모자란 부분만을 집중하여 보게 되고, 그 단점 때문에 괴로워 한다. 이는 때로 열등감으로 이어지며, 나를 발전시키는 에너지가 되기도 하나, 무드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2.공감을 하지 못한다; 계발계발계발, 자기계발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 그들이 정서적으로 공감하기 원하는 바에 대해서 거의 감정적인 몰입을 하지 못한다. 즉 공감대를 형성을 못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잡담을 하는 것에 대해서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한다. 언제나 진지한 이야기만을 원한다.

3.동경받기 원한다; 상대방에게 열등감을 항상 느끼는 이면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관심 받고 싶어하는 마음도 존재한다. 

4.실제로 누구보다도 정에 굶주려 있다; 나를 발전시켜야 되고, 존경받아야 하지만, 교감할 시간은 아까운 나 자신은 얼핏 보면 정이 필요없고 독불장군 같은 타입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사랑받고 싶어하는 나의 잠재된 욕구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대충 추려진 이 네 가지 특징은, 처음에 인정하기 민망하였고,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인정하고 나니, 내가 고쳐야 할 문제점을 분명히 볼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이 책이 내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 지 알려준 것이다.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관심과 사랑이다. 즉 호감을 얻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호감을 얻는 사람들의 성격적 특징 중 가장 분명한 것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나 보다 못난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그 사람들은 자신감과 행복한 분위기가 몸에 베어 있기 때문에, 상대방은 그에 대해 호감을 느끼게 된다. 즉 사람들은 온 몸에 긍정 에너지가 돌고 행복한 사람 곁에 있어 같이 행복해지기 원하는 것이다.

그동안 나는 우울해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항상 우울한 사람 곁에는 누구나 같이 있기 힘들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난 참 주위 사람들을 많이 힘들게 한 것 같다. 주위에 온갖 부정적 에너지를 뿜어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책에서 조언한 대로 나를 더욱 사랑하고, 인정하고, 격려하면, 억지로 긍정적인 생각으로 전환할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매사가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바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나에게 좀 더 편안하게 다가올 것이고, 좀 더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자 . 그럼 한 번 노력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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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시대:원제노르웨이의숲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 일본소설문학선
지은이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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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헌책을 싸게 팔길래, 물건들을 쭉 둘러보던 중, 눈에 띄던 책이 있었다. 영미판으로 나온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 한국판으로는 '상실의 시대'라고 나왔고, 후에 '노르웨이 숲' 으로 재차 번역 되어 나온 판이 있다.

 

지금의 하루키를 있게한 책으로 워낙 유명하여, 이전부터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감수성만 지나치게 노리는 듯한 일본 소설책들에 질려 손을 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영어라는 점이 끌려서일까, 며칠동안 손에서 놓지 않으며 시간이 날 때마다 한 장 한 장 꼼꼼히 읽어보게 되었다.

 

번역이 참 잘되어 이었기 때문에, 1Q84에서 느낄 수 이었던 하루키의 문장의 느낌을 그대로 받을 수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섬세한 심리묘사와, 주인공들의 대사 하나하나의 어조는 잔잔하고도 무거운 공기를 생생하게 느끼도록 해주었다.

 

주인공 남자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마치 내가 하루키 자신의 청춘이야기를 읽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가을 들게 하였다. 하지만 나중에 알기론 하루키는 자신의 인생을 글로 쓴다면 한페이지가 나올정도로 지루한 삶을 살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자가의 삶에 반해,  소설의 주인공은 20살인 주제에 참 온갖 상실감과, 인생무상을 느끼면서 살아간다. 절친의 자살로, 사람들과의 관계 자체에 염증을 느끼게 된 그는, 사람들을 저절로 멀리하게 되고, 사랑조차 하기 힘들어한다. 또 생각이 너무 많은 그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사람들과 가까이 있을 때에도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때문에 마음보다 생각이 앞서는 그에게 사랑이란 복잡하고 참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소설에는 주인공보다 심하거나 비슷한 사람과, 혹은 정 반대인 사람, 그리고 사랑을 잃은 상실감에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 등 정말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과 주인공의 만남과 관계의 발전으로부터, 사랑, 죽음, 상실, 이 세가지의 얽히고 얽힌 관계가 점점 구체화 되어 나간다.

 

소설 초반에 작가는 말한다. '삶과 죽음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다' .. 이 사실은 내용이 진행되는 내내 점점  확실해진다. 그리고 결국 내가 얻은 결론은, 죽음도 결국 삶인 것 처럼 사랑과 상실감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소셜미디어가 넘처나고, 언론이 활성화 되고, 핸드폰이 일상화되고, 마치 생활은 소통의 넘침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어째서인지, 소통이 부족해보이고, 사람들은 더욱더 외로워 하는 것 같다. 그로 인해 사람들의 상실감은 만연해 있는 것 같다. 나는 이것에 대한 이유를 사람들간의 사랑이 없어서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노르웨이 숲'의  하루키는 아마도, 다르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상실감에 힘겨워 한다면, 당신 역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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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에서영성으로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한국에세이
지은이 이어령 (열림원,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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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올랑은 인생이란 15분 늦게 들어간 영화관과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놓쳐버린 15분의 줄거리를 찾기 위해 신앙을 가지고 철학에 매달리는지도 모릅니다.

사실20대 때에는 교회를 비판하는 글을 많이 썼습니다. "내가 노아라면 모든 사람들이 다 물속에 빠져 죽는데 혼자 살겠다고 방주를 만드리는 않겠다. 결국엔 노아도 망령들어 죽지 않았나" 라고 호기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또 구약에는 하느님이 앞장서서 한 종족 편을 들어 상대편ㅇ르 치는데 이게 어떻게 공의의 종교나며 시비를 걸기도 했습니다. 니체나 카뮈에 매료되어, 허무주의, 실존주의,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거침없이 성서를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 관심이 아예 없었다면 그렇게 핏대를 올리지 않았겠지요. 그런 사람ㅇ ㅣ돌아선 것이지요. 아침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일들을 오후엔 알게 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역시 꿈에서라도 그리지 못한 것들을 겪고 있습니다. 살아오면서 자신이 크리스쳔이 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내가 말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 렘 33;3 )

 

신앙을 가지면서 번뜩이는 감각, 냉철한 비판력이 약해지는 것은 아닌가 묻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거꾸로입니다. 내 작은 머리에서 나온 언어와 판단이 더 큰 영성에 의지한다면 지성이나 두외 순발력이 더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지성을 넘어서는 거니까, 지성을 버리는 게 아니라 넘어서는 거니까요. 영성을 얻기 위해 지성을 버려야 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성은 깨달음으로 가는 사다리 입니다. 예수님이 왜 육체로 왔습니까? 육체로 왔다는 것은 육이 지닌 욕망, 잘난척하는 지성, 변덕스러운 감정, 이기적인 본능을 다 가지고 이 세상에 나오신 거지요. 우리와 똑같은 육의 조건 속에서도 그부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한 것이지요.

나처럼 먹물에 찌든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백 퍼센트 신자는 못 됩니다. 하루에도 몇 번 밤에 자다가도 불현듯 회의와 참회를 되풀이 하면서 살징. 문지방 위를 아슬아슬하게 거고 있는 자신이 딱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빛과 어둠 사이의 황흔이 아름답듯이 크리스천과 비크리스천의 문지방에는 긴장의 노을이 있습니다.

 

-인생이란 15분 늦게 들어선 영화관(본문)-

 
우리 아버지도, 우리 교수님도 놀랐다. 나도 놀랐다. 종교를 문화의 일부분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의 대표격인 그가 바뀌었다. 우리나라에서 문화인으로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고, 한 행동 한 마디 하나하나가 일반인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이어령씨가 처음 세례를 받았다고 했을 때, 사람들 사이에는 조용히 파문이 일었다.
 
" 그 사람도? "
" 기독교가 뭐길래, 이어령 같은 사람도.."
" 이어령도 늙었구만 "
....
 
 여전히 기독교에 대한 눈길은 곱지 않다. 이어령 같은 사람이 신앙심을 가지게 되었더라도, 기독교에 대한 악감정이 개선되기에는 그동안 종교인들이 행한 부도덕한 행실들이 너무나도 많다. 하지만 이어령의 '변심'은 기독교에 악감정을 가진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참된 모습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고 본다. 나같은 보통사람이 백날 기독교에 대해서 떠들어 봐야 사람들은 나를 보는 안경으로 기독교를 바라본다. 반면에 이어령같이 지식인이고, 사회적으로 명망받는 사람이며, 또 도덕적으로도 지적을 잘 안받는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람들은 이어령에 대한 자신들의 안경을 쓰고 기독교를 바라보면서 어쩔 수 없이 무장 해제된 눈으로 바라보게 되고, 호기심을 가지고 보며, 진리에 노출될 기회를 얻는다. 이런면에서 그가 저술한 이번 신앙 에세이는 우리나라의 그 어느 종교 서적보다, 힘이 있고 영향을 미치는 범위가 클 것이라 생각이 된다.
 
 사람들은 사람이기에 오만한 사람들을 싫어한다. 누구도 오만한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감과 오만의 경계는 참으로 애매하여 그 정도를 조절하기가 힘에 부친다. 그러기에 겸손이 우리 사회에 미덕으로 자리잡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으로, 자신도 마음을 비우게 되어 좋지만, 동시에 상대도 기분이 좋다. 덤으로 겸손하게 되면 역설적으로 도 결과적으로 자신이 더욱 높아지게 된다. 나는 최근에 기독교가 끝없는 비판의 아래에 있는 이유가, 이 겸손의 부재에 있지 않나 생각을 한다.
 
 우리 주위의 전도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자신을 낮추지 않은채 항상 대상의 선배의 입장에 있다. 당연히 그들이 먼저 시작했기에 신앙의 선배가 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들이 사람들에게 '저처럼' 예수님 믿고 죄로부터 구원받으세요, 하는 순간, 묘한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당신이 뭔데? 나보다 나은 사람인가? "   아무리 보아도 자신보다 나은 것을 증명하지도 못한 채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종교인들은 일반인들에게 오만해 보일 뿐이다.  오만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상태에서 올바른 전도가 될 리는 만무하다. 내 주위에 교회로 잘 끌어들이는 사람들은, 평소 행실이 바르고, 그러면서도 신앙 생활에 철저하고, 동시에 사회생활에도 충실하다. 신기하게도 강한 설득 없이도 자연스럽게 교회에 같이 다니게 된다. 이 사람들을 보면서 전도는 저런 방식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고 이어령씨의 이번 책도 참으로 전도를 잘하는 사람들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을 옳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시종일관, 자신을 막 기독교에 입문한 사람으로 말하기에 부끄럽다라는 태도로, 마음이란 잔잔한 호수에 조약돌 하나를 던져 파문을 만들듯이 한마디 한마디를 건낸다. 그 겸손한 그의 태도는, 깨끗하고 지적인 이미지와 맞물려서, 독자의 사고틀에서 더 큰 영향력을 가지는 메세지로 가공한다. 나의 경우에는 참으로 오랫만에 거부감 없이 작가의 의견이 나에게 완전히 녹아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랫만에 느꼇다는 것은, 오만함이 없이 강력한 메세지를 그만큼 요즘의 책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책을 읽고 또 엉뚱한 곳으로 생각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정작 책의 내용보다는 저자의 태도와, 그 임팩트에 매료되어서, 후기도 이렇게 삼천포로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책이라는게 읽는 사람마다 각각의 사고틀에 맞게 내용이 받아들여지게 마련이니, 딱히 나쁜 것이라 생각되진 않는다. 단지 책의 내용은, 나에게 일반적으로 접할 수 있엇던 스토리 라인이기 때문에 그것에 중심을 두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분명히 신앙에 대해 조금이라도 마음이 열려 있거나, 그 문지방에서 넘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들은 읽으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자의 글은 독자와 공감을 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아마도 신앙 문제에서 큰 용기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ps. (갑자기 생각난 것..)
 나를 비롯한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한 호기를 부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대게 그것은 얄팍한 지성에서 유래한게 대부분이며, 잘난척하려는 욕망에 걸쳐있을 뿐인 경우가 많다. 어떠한 지성인도, 심지어 지성을 탐할때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고 자부하는 이도, 삶의 어느 부분에서 몰려오는 회의를 피해갈 수 없다. 지성은 우리 삶에서 결코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으며, 영성으로 나아가지 않는 지성은 아무리 그 양이 많다고 자부하더라도 해변의 모래알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 시대의 대표 지성인이 영성으로 나가아갔다. 당신은 어찌할텐가. 해변의 모래알 하나를 바라볼텐가, 고개를 들어 하늘의 우주를 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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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아퀴나스신앙과이성사이에서
카테고리 인문 > 인문교양문고 > 지식인마을
지은이 신재식 (김영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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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참 편견에 가득 차있나보다. 철학을 말하는 사람들의 글은 법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문체로 항상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인지 온갖 한자어와, 쉬이 끝나지 않는 하나의 문장들은 으레 내 표정을 찡그리게 했다.

 

 그러나 이 책을 접하고 처음에 안 읽히고 어렵기만한 책이라고 욕하다가, 결국에는 무섭도록 몰입하여 빌린책에 낙서까지 하면서 읽어버렸다. 책 읽을 시간이 없어서, 책에 코를 박고 집에 갈 정도였고, 어두운 밤길에서는 핸드폰  LCD 불빛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읽게 만들었다.  그렇다고여느 철학을 다룬 책처럼 글들은 쉽게 읽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에는 내가 몰입할 수 밖에 없었던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이성을 믿는다. 감정보다는 이성을 중시하고,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은 썩 좋아하지 않고,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인과가 있고, 충분히 설명 가능한 부분들이 반드시 있다고 믿는다. 지나가던 길 위의 잡초를 보고 생태계의 복잡한 관계를 생각해 보고, 학원에 급히 뛰어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우울한 우리나라의 교육현실과, 그 근본 원인을 탐구해본다. 때론 이런식으로 생각하는 것에 지쳐서, 멍한 상태로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내 휴식을 달리하기도 한다.

 

 그런 나에게 어느날 종교라는 것이 내 삶으로 깊숙히 들어왔다.  지금 난 2년동안 빠짐없이 교회에 다니고 있고, 식사 전에 기도를 하고, 아침에 큐티로 하루 일과로 시작을 한다. 하지만 아직도 내 이성이 따라가지 못하는 성서의 이야기들과 가르침들은 이성과 믿음, 그 사이의 바다같은 괴리감 어느 한 곳에 떠 돌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버티고 있는 이유는, 애써 그것들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나는 이성과 종교를 설명하는 책들에게 눈을 돌린다. 괴리감을 채워줄 수 있는 무언가를 애타게 찾았다. 때로는 이 질긴 어색함을 끝내기 위해, 종교 킬러같은 도킨슨의 저작들을 읽어볼 생각하기도 했고, 그런 생각은 얼마전에도 들던 것이다. 하지만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언제나 책과의 만남은 특별하고, 운명적인다. 도서관 카트에 재배치되어 있던 책들을 지나치다가 딱 한권만 보였으니, 바로 이 책이다. <신앙과 이성사이에서 : 아우구스티누수 & 아퀴나스>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독교 신학사에서 그 차지하는 비중이 어마어마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이라는 주춧돌 위에, 이성이라는 기반을 놓고 그 자신들의 사상으로 기둥을 세워 서구 문화와 예술을 꽃피우는데 엄청난 영향을 미친 이들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활동 시기는 천년이라는 시간차를 두지만, 그 두 사람의 사상은 상류가 하류로 이어지듯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다. 바로 이성으로.

 

 그동안 나의 생각은 기독교의 신앙은 이성으로 대하긴 너무 힘들다고 여겼다. 아니면 이성을 완전히 배제한 상태여야 그들이 말하는 참된 신앙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나는 극단적인 이성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는 과학자들이(예들 들면 도킨스) 종교를 혐오하거나 거부하는 이유를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책의 제목과, 내용을 접하는 순간, 이성과 신앙이 연결되는 접점을 제시받는 그 순간, 나는 무엇인지 모를 전율을 느꼈다.(아마도 카타르시스라고 부르는 그것) 오랫동안 묵은 문제점들을 한번에 씻어내리는 듯한 느낌은 마음속의 한가득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하였다. 책에 제시된 해답은 명쾌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사상은 2가지 문장으로 각각 정리된다.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 -아우구스티누스-
 "믿기 위해 이해한다."   -토마스 아퀴나스-
 얼핏보면 인과를 바꾸어 놓기만 할 뿐 전혀 타협의 여지가 없어보이는 두 말은 실제로는 같은 흐름을 타고 있고, 이성과 신앙에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평화적인 공존)을 공통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짧게 그들의 신학을 훑어보면 다음과 같다.

 

 본질과 감각으로 인식되는 현실을 구분하는 이원론을 만들어낸 플라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이다. 그가 마니교를 믿던 시절,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성서의 내용들을 신플라톤주의적인 해석을 기반으로한 강해를 듣고는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그 후로는 독자적인 기독교 신학을 형성하기 시작하는데 그 때에 플라톤 주의는 여전히 유용하게 쓰였다. 그러나 완전히 플라톤주의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고, 신플라톤주의를 기독교에 맞추어 비판적인 수용을 한 것이고, 아우구스티누는 플라톤주의로 신의 세계 창조와, 존재를 설명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행복하기 위해" 진리를 추구하였다. 하지만 플라톤의 이원론에 영향을 받아 출현한 회의론자들은 진리를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가, 라며 반문하면서 기독교에 대해 삐딱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만일 내가 속고 있다면, 나는 존재한다 ( si fallor, sum ) 이라는 유명한 말로 자신의 존재를 확립하고, 하나님의 존재, 즉 진리의 존재를 확신하였다. 또 그는 이 진리는 감각들로 얻는 일반적인 지식들과는 달리 고차원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정신으로 획득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하나님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것이 바로 '조명설' 이고, 인간의 이성에 하나님이 조명을 비추듯 도움을 주어야 진리에 가까워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조명설에 입각하여, 영원한 진리를 탐닉했던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신앙이 전제해야 그 진리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고, "이해하기위해 믿는다" 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던 것이다.

 

 그에 반해 천년후의 인물인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영향을 받았다. 플라톤과는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상은 현실 세계에서 발견되는 형태라고 하며, 감각의 우위를 역설하였기 때문에, 이는 앞선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었고 종교계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금지되기 까지 하였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의 추구하는 트렌드와 맞물려서 전 지역을 휩쓸었고, 신학 아래 놓여있던 자연철학이 신학을 넘어 큰 지성의 흐름으로 발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신학의 접점을 찾으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과거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에서는, 이성의 독자적인 영역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감각을 인정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입각한 아퀴나스는 이성의 자율적인 부분을 인정하였다. 동시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하듯이,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의 계시에 대해서는 조명설을 지지하였다. 그는 신학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자연신학과, 믿음을 전제로한 계시신학으로부터 구분하였고, 인간의 감각기관과 이성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이해하는 자연철학을 영역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이성이 억압받던 중세시대(dark age) 로부터 근대적인 사상이 출현하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으며, 유럽에서 자연과학이 급격히 발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첨예하게 대립하던 이성과 신앙은 다시 한번 평화롭게 공존하게 되었다. (다윈의 진화론이 출현하기 전까지.)

 

 


 나의 꿈은 과학의 영역에서 오랫동안 몸을 담는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종교적인 생활과 과학자로서의 생활에서 유발되는 끝없는 내면의 싸움을 견뎌내야 한다는 사실에 꽤나 우울해 있었고, 자신이 없기도 했었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너무나도 큰 선물이었다. 내가 앞으로 가져야 할 학문적 태도와, 신앙적 태도가 첨예하게 대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같이 갈 수 있는 관계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마음의 커다란 부담을 덜어내게 되었다. 그럼 왜 나는 종교를 포기하면 되는 것을 왜 굳이 부담을 가지고 사는 것인가?

 

 사람의 행복은 물질적 풍족이나, 지적인 충만함, 혹은 사회적 지위로서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고 난 믿는다. 멀지 않은 사람들의 예를 보면 그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달리고 넘어지면서, 행복의 실마리를 잡기위해 애쓴다. 하지만 매번 그 실패에 좌절하곤 한다. 그리고 행복은 점점 멀게만 느껴지고, 사람들은 점점 단순한 쾌락을 행복으로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을 주위에서 많이 보면서 이런 저런 행복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니, 가장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살펴보게 되었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참 된) 종교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는 온갖 욕을 먹고 살지만 (욕먹을 짓을 하는 사람들이 많긴 하다) 헛된 욕심을 쫓아서 사는 이들보다 훨씬 행복해 보이기에, 나는 신앙심을 키우기 위해 지속적으로 애쓰고 있다.

 

 

아마도 이 책과의 만남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계시" 일지도 모른다.

 

 

 

ps.
 책은  크게 4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책의 내용으로 초대하는 1장, 두 큰 사상가들을 소개하고 연관시키는 2장, (두번째 장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과, 아퀴나스의 생각을 각각 나누어 설명한다. 각각의 인물의 학문적 성장의 배경을 설명하고, 시대적 상황을 조명한 다음, 본격적으로 그들의 사상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 그리고 데카르트의 가상 토크가 있는 3장, 그리고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많이 인구에 회자되는 이슈들을 책의 내용에 입각해 정리해 놓은 4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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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독서세상을바꾼위험하고위대한생각들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 인문교양
지은이 유시민 (웅진지식하우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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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자친구가 생일 선물로 준 6권의 책들 중 한권인 이 책.

생일 전 주 부터 며칠에 한권씩 주기 시작했는데, 이 책을 받는 당일에는 기분이 너무 않좋아서, 책에 대해서 투덜거리고 말았다. 그 때 기분이 않좋다고는 안하고, 괜한 핑계를 대었는데, 그 내용이 웬지 책이 너무 어두울 것 같아서 였다는 것이다. 사실 유시민에 대하여 스처 지나가듯이 뉴스로 접하였지, 그 외에 내가 아는 바는 전혀 없었다. 때문에 나의 편견으로 유시민의 책은 그저 '어둡고' '전투적인'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밝은 느낌의 유쾌한 글이 필요했던 것 같다.

 

하지만 막상 책을 읽고나니, 수많은 다독으로 얻는 지성의 양분을, 단 한권에 의해 액기스를 섭취한 느낌을 받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그 곳에 있었다. 그리고 글로서 사람의 마음에 불을 지피는 대단한 능력을 유신민이란 사람이 가졌음에 매우 놀라웠다. 

 

작가는 자타가 공인하는 진보세력의 대표 지식인이다. 리틀 노무현이라 불리며, 야당의 차기 대권 후보로 지목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보수 세력이 막강한 우리나라에서, 쓴소리를 멈추지 않고 소신있는 행보를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고, 그로 인해 그는 우리나라의 우향우 언론들에 의해서 쉬지 않고 짓밟히곤 한다. 물질이 우선되고, 부 자체가 목적이 되어, 서로 무한 경쟁에 몰아 넣는 사람들의 사회에서, 유시민처럼 가치판단의 전선에서 프런티어의 역할을 하기란 쉽지가 않다. 더구나 예전처럼 아군들의 힘도 미약하기만 한 때에.. 그는 왜 이런 삶을 택하였을까?

 

인생의 방향은 청춘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정해진다고 믿는다. 청춘을 보내며 삶의 가치에 한번도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그의 앞으로의 인생은 타인의 가치에 휘둘리며 살게 되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누구보다 확고한 신념을 따르고 실천하는 유시민에게 가치의 우선순위를 정할 수 이도록 기회를 제공한 것은 청춘의 독서였다. 길로 비유되는 인생에서 그의 책들은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였고, 길옆 깊은 도랑으로 빠지지 않도록 인도하여 주었다.

 

노 전 대통령과,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진보적 가치가 힘을 잃어갔다. 그 세력에는 침통한 분위기가 가득하였기에 ,유시민은 다시 한번 비틀거릴 수 밖에 없었고, 그에게 등대가 되었던 책들을 다시 펼쳐보았다. 그것들은 작가에게 어김없는 감동과 힘을 주었고, 그는 이 감동과 힘을 더 많은 사람과 함께 나누기 위해 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유시민은 '죄와 벌' 로부터, 선을 위한 악이 정당화 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고찰을 하고, '전환시대의 논리' 로부터 지식인으로서의 태도를 가르침 받았다. '공산당 선언'을 통하여 뜨거운 가슴을 느꼈고, 멜서스의 '인구론' 을 읽고 분노와 안타까움을 느꼈다. 푸시킨의 책을 읽으면서, 밝은 사회를 열망을 꿈꾸었고, '맹자'에게 참된 보수의 의미를 배웠다. '광장'을 읽고, 현재의 상황에 큰 회의를 느끼고, '사기'를 통해 정치를 알았다. 그 외에도 '종의 기원' , '유한계급론' '진보와 빈곤' 등등 많은 책들을 접하면서 유시민은 자신의 가치사슬 탑 골조를 형성하였다.

 

나는 이 책들 중 하나도 읽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마지막 책장을 읽어 넘긴 다음, 한참 동안 허공 어딘가에 초점도 맞추지 못한 채, 큰 감동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책에 대한 책을 읽고도 이리도 감동을 받는다면, 원작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은 과연 어떠할까? 꺼져있는 등대에 환한 빛을 달아 어둠속에서 좌표 하나를 얻을 때마다 마음속의 벅참은 어느 정도일까?.. 나는 벌써부터 두근거리고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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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뇌의비밀
카테고리 과학 > 교양과학 > 뇌과학
지은이 안드레아 록 (지식의숲,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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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만할때 다시 꾸는 꿈이 있다. 대단히 어지러운 이미지의 연속물인데, 깨어서 그 꿈을 기억하고자면 여간 힘들 수 가 없다. 다만 매우 격한 정서를 담고 있었다는 사실밖에는 알 수가 없었다.

 

이런 꿈을 꾸는 경험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쉽게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단지 꿈은 미래를 말해주는 주술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과, 혹은 프로이트가 말하듯 일상에서 표출되지 못한 욕망의 형태일 것이라 간주한다.

 

하지만 이 책은 철저히 과학적인 실험과, 추론으로 꿈의 비밀을 파해치고 있다. 막연하게 생각하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던 것에 대한 놀라운 사실들을 속사포처럼 던저주는 이 책은 마지막 장을 읽는 순간까지 우리 뇌에 대한 경외감을 일으킨다. 워낙 주옥같은 정보들이 넘쳐나는 바람에 펜을 들고 즉각즉각 중요한 것들을 메모를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또 이번에 단편적인 지식 조각들을 메모로 남긴 일은 앞으로 내 독서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기대가 된다. 솔직한 바람으로는 늙어서도 수십권의 노트를 만들게 되었으면 한다.

 

이 책은 꿈 연구의 시작으로부터 가장 최근의 연구까지, 연대기적 구성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가장 처음에는 꿈에대한 인간의 첫 궁금증을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REM 수면상태가 꿈을 주로 꾸는 상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사건을 계기로 촉발되는 꿈연구의 전성기를 여러장에 걸처서 설명한다. 그 전성기에 이루어진 다양한 발견과 흥미로운 실험들은 과학자들의 엉뚱한 호기심과, 예리한 관찰력에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그리고 책의 후반에서는 꿈연구의 학문적 유용성을 설파하고 있는데, 미국역시 실용적인 학문에 대한 지원만 아끼지 않는 현실에서 피해가지 않는 다는 것을 확인하니 안타까웠다. 작가는 급격히 줄어드는 꿈연구에 대한 투자가 줄어드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기에 이 책을 저술하게 되었던것 같다.

 

가장 흥미로웠던 몇가지 내용들을 간단히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 꿈의 기억은 REM 수면기에 깨우면 잘 할 수 있다는 것.

- non-REM 시기에도 꿈은 꿀 수 있다는 것.

- 꿈을 꿀 수 있는 시기는 보통 5살 이후인데, 그 이유는 시공간지각능력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

- 꿈의 정서는 편도체 관할의 강렬한 정서 : 분노, 공포 가 주로 나타난다는 것.

- 자각몽은 훈련 가능하다는 것.

- 꿈은 각성상태에서 접한 뇌의 자극을 재정리 하는 과정이라는 것.

- 잠을 자면 기억의 효율이 좋아진다는 것.

- 우울증 치료는 약물로도 가능하지만, 수면치료의 길도 열려있다는 것.

꿈꾸는뇌의비밀
카테고리 과학 > 교양과학 > 뇌과학
지은이 안드레아 록 (지식의숲,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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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하라의생물학카페
카테고리 과학 > 청소년 교양과학
지은이 이은희 (궁리,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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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생물학적 지식을 엮은 그녀의 글을 네이버 캐스트에서 종종 보곤 했다. 젊은 나이에, 과학적 지식이 부족한 이들을 위해서 어려운 지식도 쉽게 풀어 설명하려는 작가의 결정에 감동하여 나는 이 책을 빌려보게 되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수많은 주제로 짤막한 글들이 이어지는 이책은 부족한 점이 너무 많이 보였다.

 

첫째로, 신화와 과학을 매끄럽게 연결하는데 실패했다. 그냥 한쪽엔 신화 한편, 다른 쪽엔 과학잡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글들을 나열해 놓은 것에 불과했다.

 

둘째로, 아이들에게 설명하듯 부드럽고 아기자기한 문체로 내용을 풀어가지만 정작 그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생물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자들이나, 어른들이라는 것이다. 고유명사 하나를 사용할 때 남들도 이 단어를 알 것이라는 전제는 위험하다. 특히나 대상층을 넓게 겨냥하고 쓴 교양과학 서적에서, 이런 전제는 더욱더 그러한데, 이 책은 어려운 단어를 이쁜 문체와 아무렇지않게 섞어 쓴 책, 그 이하 이상도 아니었다. 생물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보면 손발이 오그라들고, 일반인들이 보면 친절한듯 한데, 당최 무슨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글이 되는 것이다.

 

셋째, 이건 지극히 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이다. 블로그 글 답게 자기 주장이 들어있는 것은 어쩔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내용들이 너무나 한쪽으로 쏠려있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불편할 수 밖에 없다. 그 예로, 그녀는 여자 과학자로서 진화론적인 생각을 기본적으로 탑재하고 모든 사물을 대하기 때문인지, 성역할, 낙태나, 동성애, 그리고 생명에 대한 정의 등등 여러 부분에서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 거기에 약간의 감정이 실린듯한 어조의 글까지..

 

이같은 이유로, 책이 너무나 얇고 폰트도 크고, 그림도 많아서 단시간 안에 읽을 수 있었으나, 매우 읽기 힘들고 오래걸린 책이었다. 젊은 과학자로서 지식의 대중화에 힘쓰는 그녀가 멋지기도 하나, 그녀의 첫작품인 이 책은 아직 성장중인 과학자로서 그녀를 보여주듯, 마치 성장기의 저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책들은 읽기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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