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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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려령 (창비,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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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랜만에 읽는 소설이다. 정보에 목마르다 보니, 소설을 통한 간접 경험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가지기 어려웠다. 그러다 어느날 두께도 적당하고, 제목에서 풍겨오는 이 책의 섬뜩함에 끌려 첫장을 넘겼고, 바로 끝장을 향해 쉼없이 달려가게 되었다.

"내일을 준비하던 천지가, 오늘 죽었다."

중학생 두 남매와 어머니가 밥상에서 티격티격 하는 여느 평범한 집의 아침 풍경으로 시작하는 듯 하던 내용은, 바로 두번 째 페이지에서 동생의 죽음으로 기습을 날린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동생 천지는 왜 죽었을까? 언니 만지와 엄마는 그녀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러나 그 죽음이 주는 선명함에 가슴아파한다. 그래서 언니 만지는 동생의 죽음 이면에 있는 사실을 파해치기 시작하고, 동생 주위의 인물들로부터 퍼즐을 하나씩 찾아나간다.
절친이라고 여겼던 화연, 천지에게 어느 정도 관심을 보였던 미라, 천지를 알고 있던 옆집 백수 아저씨...  이들은 천지가 스스로 짧은 삶을 선택하게 된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


비밀 하나. - 화연

천지네는 경제적으로 어렵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 혼자 두 자매를 키우고 있고, 여러 집을 전전하면서 힘든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일까 천지는 소극적이고 학교에서 도무지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아이이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공부를 못하지도 않고 잘하지도 않는 중위권에 머무르면서 스스로를 숨기고 또 숨겼다.  
이랬던 천지에게 먼저 다가온 아이는 화연이었다. 그러나 결코 좋은 의도에서 다가온 것은 아니었다. 천지와 의도적으로 가까워진 다음 천지에게 친근한 듯 행동하며 그녀의 유일한 친구임을 내세웠지만, 이 관계는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였다. 여러 친구들에게 온갖 좋은 것들을 해주며 다가가서는, 천지의 험담과 거짓 소문을 공유하면서 친해지려 하는 것이 화연이의 진짜 모습이었다.

천지는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그저 아웃사이더였다. 하지만 화연은 그저 혼자 있을 뿐이엇던 천지를 은따(은근한 따돌림) 혹은 왕따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장본인이었다. 이것이 천지를 벼랑으로 몰아갔던 실체의 비밀 하나.


비밀 둘. - 엄마와 만지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천지네는 그렇게 살갑고 정넘치고 화목한 가정과는 거리가 멀다. 되려 경제적인 공백을 메꾸기 위해 낮밤으로 일하기 바쁜 어머니는, 민감한 사춘기 시기의 자매에게 정서적인 의지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일까? 억척스럽고 성격이 센 엄마와 언니는 소극적이고 세심한 성격의 천지와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어울리지 못했던 것 같다.

책의 중간에 천지의 나레이션이 있다. 가족들이 천지의 평소와 다른 언행과 행동마저 지나쳐버린 후.
"내가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그만 떠나야 했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천지를 보이지 않는 아이로 만든 것은 가족이었던 것이지 않을까? 안타까운 비밀 둘.


비밀 셋. - 미라

미라는 책에 등장하는 두 가정의 지저분한 관계의 중간에 있는 인물이다. 천지 어머니와 애인 관계에 있던 남자의 딸로, 천지가 아버지의 애인인 것을 알고는 천지를 탐탁치 않게 본다. 물론 그녀는 탕자였던 아버지를 더욱 싫어하지만, 이유가 분명치 않은 감정은 천지를 미워하게만 만든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직접적으로 천지에게 표출되지 않고, 복잡한 상황들과 맞물려서 나타나고 만다.

평소에 미라는 천지를 의도적으로 괴롭히는 화연의 모습을 보면서 매우 역겨워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괴롭힘을 곧이 곧대로 받고도 계속 같이 지내는 천지가 이해되지 않앗고, 또 자신의 아버지로 얽힌 천지와의 관계때문에, 연민보다는 한심함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어느날 미라는 천지에게 화연의 본 모습을 명확히 각인시켜주지만 이는 그녀에게 어쩌면 화연의 괴롭힘보다 더 가혹할 수 있는 일이었다. 화연의 행동은 항상 같이 있는 천지가 더 잘 아는 법이었다. 천지는 이 모든 것을 감내하고 있었고, 상처받고 있었지만 아물게 하면서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미라가 화연의 모습을 다시금 천지에게 확인시켜주면서, 천지의 상처를 날카롭게 파고든 것이었다.

화연이 천지를 벼랑으로 몰았지만, 그녀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린 것은 미라의 순수하지 않은 천지에 대한 관심.


비밀 넷. - 옆집 백수 아저씨

아저씨는 천지와 도서관에서 종종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다. 천지의 죽음의 비밀을 캐내던 만지는, 이 사람으로부터 그녀가 천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아저씨는 자신이 천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에, 그녀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천지가 아저씨에게 보인 모습은 천지가 낯선 이를 경계하기 위한 가면을 쓴 모습이었을 뿐이다. 

"당신은 날 아는게 결코 아니야"  -천지-
 천지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는 제 3자의 오만함.





이 네가지 비밀들은 나이게 너무나 소름끼치게 공감을 강요하며 다가왔다. 천지의 모습에서 나의 외로움을 보았고, 주위 인물들에게 천지가 받던 폭력의 실체가 투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외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위안을 얻고 존재감을 얻곤 하지만 개중에는 나와 같이 외로우면서도 혼자로 자주 회귀하는 돌연변이가 있다. 이런 돌연변이들에게 이 세상은 너무나 가혹하다.

돌연변이로서 가장 아프게 다가온 것은 미라가 천지에게 했던 것과 같은 행동이었다. 너무나 아픈 사람에게 진심이 담기지 않고 겉치레거나 불순한 의도가 담긴 관심은 없으니만 못하다. 책임지지도 못하는 관심은 호기심에 남의 상처를 드러내보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화연이와 같은 직접적이고 가장 많은 상처를 준 것들이 잘못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피해자들은 이런 직접적인 가해자들만으로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리지 않는 다는 것이다.

우리는 따돌림 문제를 바라볼때 매우 다양하게 접근을 해야 한다. 화연이 뿐만 아니라 무관심한 가족들, 거짓된 관심의 미라, 착각하는 아저씨 , 이 모두를 함께 바라보아야 한다. 사람대 사람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왕따 문제인 만큼 어느 누구도 용의선상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간혹 왕따로 인해 고통받는 아이들 문제를 볼 때, 사람들이 직접적인 가해자들에게만 집중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숨길 수가 없다. 이것 또한 미라와 같은 거짓된 관심일 뿐이고, 피해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깊이 공감하고 마음 속 자리잡은 상처를 어루만져줄 수 있는 진심 섞인 관심이다.


지금부터 시작이야. 마지막 털실 뭉치를 찾을 때까지……. ― 언니 만지 

삶을 일찍 마무리한 천지는 용서한다는 편지를 숨겨 놓은 털뭉치를 죽기전에 사람들에게 주었다. 용서받은 만지와 사람들은 아마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애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도 우리의 세상에는 모든 것을 자신이 떠 안으며, 용서를 담은 털실뭉치를 짜고 있을 사람들에게 "잘 지내나요?" 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 기회를 더이상 놓지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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