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에서영성으로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한국에세이
지은이 이어령 (열림원, 2010년)
상세보기

로맹 올랑은 인생이란 15분 늦게 들어간 영화관과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놓쳐버린 15분의 줄거리를 찾기 위해 신앙을 가지고 철학에 매달리는지도 모릅니다.

사실20대 때에는 교회를 비판하는 글을 많이 썼습니다. "내가 노아라면 모든 사람들이 다 물속에 빠져 죽는데 혼자 살겠다고 방주를 만드리는 않겠다. 결국엔 노아도 망령들어 죽지 않았나" 라고 호기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또 구약에는 하느님이 앞장서서 한 종족 편을 들어 상대편ㅇ르 치는데 이게 어떻게 공의의 종교나며 시비를 걸기도 했습니다. 니체나 카뮈에 매료되어, 허무주의, 실존주의,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거침없이 성서를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 관심이 아예 없었다면 그렇게 핏대를 올리지 않았겠지요. 그런 사람ㅇ ㅣ돌아선 것이지요. 아침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일들을 오후엔 알게 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역시 꿈에서라도 그리지 못한 것들을 겪고 있습니다. 살아오면서 자신이 크리스쳔이 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내가 말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 렘 33;3 )

 

신앙을 가지면서 번뜩이는 감각, 냉철한 비판력이 약해지는 것은 아닌가 묻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거꾸로입니다. 내 작은 머리에서 나온 언어와 판단이 더 큰 영성에 의지한다면 지성이나 두외 순발력이 더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지성을 넘어서는 거니까, 지성을 버리는 게 아니라 넘어서는 거니까요. 영성을 얻기 위해 지성을 버려야 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성은 깨달음으로 가는 사다리 입니다. 예수님이 왜 육체로 왔습니까? 육체로 왔다는 것은 육이 지닌 욕망, 잘난척하는 지성, 변덕스러운 감정, 이기적인 본능을 다 가지고 이 세상에 나오신 거지요. 우리와 똑같은 육의 조건 속에서도 그부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한 것이지요.

나처럼 먹물에 찌든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백 퍼센트 신자는 못 됩니다. 하루에도 몇 번 밤에 자다가도 불현듯 회의와 참회를 되풀이 하면서 살징. 문지방 위를 아슬아슬하게 거고 있는 자신이 딱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빛과 어둠 사이의 황흔이 아름답듯이 크리스천과 비크리스천의 문지방에는 긴장의 노을이 있습니다.

 

-인생이란 15분 늦게 들어선 영화관(본문)-

 
우리 아버지도, 우리 교수님도 놀랐다. 나도 놀랐다. 종교를 문화의 일부분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의 대표격인 그가 바뀌었다. 우리나라에서 문화인으로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고, 한 행동 한 마디 하나하나가 일반인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이어령씨가 처음 세례를 받았다고 했을 때, 사람들 사이에는 조용히 파문이 일었다.
 
" 그 사람도? "
" 기독교가 뭐길래, 이어령 같은 사람도.."
" 이어령도 늙었구만 "
....
 
 여전히 기독교에 대한 눈길은 곱지 않다. 이어령 같은 사람이 신앙심을 가지게 되었더라도, 기독교에 대한 악감정이 개선되기에는 그동안 종교인들이 행한 부도덕한 행실들이 너무나도 많다. 하지만 이어령의 '변심'은 기독교에 악감정을 가진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참된 모습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고 본다. 나같은 보통사람이 백날 기독교에 대해서 떠들어 봐야 사람들은 나를 보는 안경으로 기독교를 바라본다. 반면에 이어령같이 지식인이고, 사회적으로 명망받는 사람이며, 또 도덕적으로도 지적을 잘 안받는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람들은 이어령에 대한 자신들의 안경을 쓰고 기독교를 바라보면서 어쩔 수 없이 무장 해제된 눈으로 바라보게 되고, 호기심을 가지고 보며, 진리에 노출될 기회를 얻는다. 이런면에서 그가 저술한 이번 신앙 에세이는 우리나라의 그 어느 종교 서적보다, 힘이 있고 영향을 미치는 범위가 클 것이라 생각이 된다.
 
 사람들은 사람이기에 오만한 사람들을 싫어한다. 누구도 오만한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감과 오만의 경계는 참으로 애매하여 그 정도를 조절하기가 힘에 부친다. 그러기에 겸손이 우리 사회에 미덕으로 자리잡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으로, 자신도 마음을 비우게 되어 좋지만, 동시에 상대도 기분이 좋다. 덤으로 겸손하게 되면 역설적으로 도 결과적으로 자신이 더욱 높아지게 된다. 나는 최근에 기독교가 끝없는 비판의 아래에 있는 이유가, 이 겸손의 부재에 있지 않나 생각을 한다.
 
 우리 주위의 전도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자신을 낮추지 않은채 항상 대상의 선배의 입장에 있다. 당연히 그들이 먼저 시작했기에 신앙의 선배가 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들이 사람들에게 '저처럼' 예수님 믿고 죄로부터 구원받으세요, 하는 순간, 묘한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당신이 뭔데? 나보다 나은 사람인가? "   아무리 보아도 자신보다 나은 것을 증명하지도 못한 채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종교인들은 일반인들에게 오만해 보일 뿐이다.  오만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상태에서 올바른 전도가 될 리는 만무하다. 내 주위에 교회로 잘 끌어들이는 사람들은, 평소 행실이 바르고, 그러면서도 신앙 생활에 철저하고, 동시에 사회생활에도 충실하다. 신기하게도 강한 설득 없이도 자연스럽게 교회에 같이 다니게 된다. 이 사람들을 보면서 전도는 저런 방식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고 이어령씨의 이번 책도 참으로 전도를 잘하는 사람들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을 옳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시종일관, 자신을 막 기독교에 입문한 사람으로 말하기에 부끄럽다라는 태도로, 마음이란 잔잔한 호수에 조약돌 하나를 던져 파문을 만들듯이 한마디 한마디를 건낸다. 그 겸손한 그의 태도는, 깨끗하고 지적인 이미지와 맞물려서, 독자의 사고틀에서 더 큰 영향력을 가지는 메세지로 가공한다. 나의 경우에는 참으로 오랫만에 거부감 없이 작가의 의견이 나에게 완전히 녹아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랫만에 느꼇다는 것은, 오만함이 없이 강력한 메세지를 그만큼 요즘의 책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책을 읽고 또 엉뚱한 곳으로 생각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정작 책의 내용보다는 저자의 태도와, 그 임팩트에 매료되어서, 후기도 이렇게 삼천포로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책이라는게 읽는 사람마다 각각의 사고틀에 맞게 내용이 받아들여지게 마련이니, 딱히 나쁜 것이라 생각되진 않는다. 단지 책의 내용은, 나에게 일반적으로 접할 수 있엇던 스토리 라인이기 때문에 그것에 중심을 두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분명히 신앙에 대해 조금이라도 마음이 열려 있거나, 그 문지방에서 넘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들은 읽으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자의 글은 독자와 공감을 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아마도 신앙 문제에서 큰 용기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ps. (갑자기 생각난 것..)
 나를 비롯한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한 호기를 부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대게 그것은 얄팍한 지성에서 유래한게 대부분이며, 잘난척하려는 욕망에 걸쳐있을 뿐인 경우가 많다. 어떠한 지성인도, 심지어 지성을 탐할때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고 자부하는 이도, 삶의 어느 부분에서 몰려오는 회의를 피해갈 수 없다. 지성은 우리 삶에서 결코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으며, 영성으로 나아가지 않는 지성은 아무리 그 양이 많다고 자부하더라도 해변의 모래알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 시대의 대표 지성인이 영성으로 나가아갔다. 당신은 어찌할텐가. 해변의 모래알 하나를 바라볼텐가, 고개를 들어 하늘의 우주를 탐할 것인가?
 
 

[댓글] 소감을 적어주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