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아퀴나스신앙과이성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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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신재식 (김영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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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참 편견에 가득 차있나보다. 철학을 말하는 사람들의 글은 법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문체로 항상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인지 온갖 한자어와, 쉬이 끝나지 않는 하나의 문장들은 으레 내 표정을 찡그리게 했다.

 

 그러나 이 책을 접하고 처음에 안 읽히고 어렵기만한 책이라고 욕하다가, 결국에는 무섭도록 몰입하여 빌린책에 낙서까지 하면서 읽어버렸다. 책 읽을 시간이 없어서, 책에 코를 박고 집에 갈 정도였고, 어두운 밤길에서는 핸드폰  LCD 불빛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읽게 만들었다.  그렇다고여느 철학을 다룬 책처럼 글들은 쉽게 읽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에는 내가 몰입할 수 밖에 없었던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이성을 믿는다. 감정보다는 이성을 중시하고,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은 썩 좋아하지 않고,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인과가 있고, 충분히 설명 가능한 부분들이 반드시 있다고 믿는다. 지나가던 길 위의 잡초를 보고 생태계의 복잡한 관계를 생각해 보고, 학원에 급히 뛰어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우울한 우리나라의 교육현실과, 그 근본 원인을 탐구해본다. 때론 이런식으로 생각하는 것에 지쳐서, 멍한 상태로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내 휴식을 달리하기도 한다.

 

 그런 나에게 어느날 종교라는 것이 내 삶으로 깊숙히 들어왔다.  지금 난 2년동안 빠짐없이 교회에 다니고 있고, 식사 전에 기도를 하고, 아침에 큐티로 하루 일과로 시작을 한다. 하지만 아직도 내 이성이 따라가지 못하는 성서의 이야기들과 가르침들은 이성과 믿음, 그 사이의 바다같은 괴리감 어느 한 곳에 떠 돌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버티고 있는 이유는, 애써 그것들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나는 이성과 종교를 설명하는 책들에게 눈을 돌린다. 괴리감을 채워줄 수 있는 무언가를 애타게 찾았다. 때로는 이 질긴 어색함을 끝내기 위해, 종교 킬러같은 도킨슨의 저작들을 읽어볼 생각하기도 했고, 그런 생각은 얼마전에도 들던 것이다. 하지만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언제나 책과의 만남은 특별하고, 운명적인다. 도서관 카트에 재배치되어 있던 책들을 지나치다가 딱 한권만 보였으니, 바로 이 책이다. <신앙과 이성사이에서 : 아우구스티누수 & 아퀴나스>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독교 신학사에서 그 차지하는 비중이 어마어마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이라는 주춧돌 위에, 이성이라는 기반을 놓고 그 자신들의 사상으로 기둥을 세워 서구 문화와 예술을 꽃피우는데 엄청난 영향을 미친 이들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활동 시기는 천년이라는 시간차를 두지만, 그 두 사람의 사상은 상류가 하류로 이어지듯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다. 바로 이성으로.

 

 그동안 나의 생각은 기독교의 신앙은 이성으로 대하긴 너무 힘들다고 여겼다. 아니면 이성을 완전히 배제한 상태여야 그들이 말하는 참된 신앙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나는 극단적인 이성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는 과학자들이(예들 들면 도킨스) 종교를 혐오하거나 거부하는 이유를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책의 제목과, 내용을 접하는 순간, 이성과 신앙이 연결되는 접점을 제시받는 그 순간, 나는 무엇인지 모를 전율을 느꼈다.(아마도 카타르시스라고 부르는 그것) 오랫동안 묵은 문제점들을 한번에 씻어내리는 듯한 느낌은 마음속의 한가득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하였다. 책에 제시된 해답은 명쾌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사상은 2가지 문장으로 각각 정리된다.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 -아우구스티누스-
 "믿기 위해 이해한다."   -토마스 아퀴나스-
 얼핏보면 인과를 바꾸어 놓기만 할 뿐 전혀 타협의 여지가 없어보이는 두 말은 실제로는 같은 흐름을 타고 있고, 이성과 신앙에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평화적인 공존)을 공통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짧게 그들의 신학을 훑어보면 다음과 같다.

 

 본질과 감각으로 인식되는 현실을 구분하는 이원론을 만들어낸 플라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이다. 그가 마니교를 믿던 시절,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성서의 내용들을 신플라톤주의적인 해석을 기반으로한 강해를 듣고는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그 후로는 독자적인 기독교 신학을 형성하기 시작하는데 그 때에 플라톤 주의는 여전히 유용하게 쓰였다. 그러나 완전히 플라톤주의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고, 신플라톤주의를 기독교에 맞추어 비판적인 수용을 한 것이고, 아우구스티누는 플라톤주의로 신의 세계 창조와, 존재를 설명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행복하기 위해" 진리를 추구하였다. 하지만 플라톤의 이원론에 영향을 받아 출현한 회의론자들은 진리를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가, 라며 반문하면서 기독교에 대해 삐딱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만일 내가 속고 있다면, 나는 존재한다 ( si fallor, sum ) 이라는 유명한 말로 자신의 존재를 확립하고, 하나님의 존재, 즉 진리의 존재를 확신하였다. 또 그는 이 진리는 감각들로 얻는 일반적인 지식들과는 달리 고차원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정신으로 획득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하나님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것이 바로 '조명설' 이고, 인간의 이성에 하나님이 조명을 비추듯 도움을 주어야 진리에 가까워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조명설에 입각하여, 영원한 진리를 탐닉했던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신앙이 전제해야 그 진리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고, "이해하기위해 믿는다" 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던 것이다.

 

 그에 반해 천년후의 인물인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영향을 받았다. 플라톤과는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상은 현실 세계에서 발견되는 형태라고 하며, 감각의 우위를 역설하였기 때문에, 이는 앞선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었고 종교계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금지되기 까지 하였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의 추구하는 트렌드와 맞물려서 전 지역을 휩쓸었고, 신학 아래 놓여있던 자연철학이 신학을 넘어 큰 지성의 흐름으로 발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신학의 접점을 찾으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과거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에서는, 이성의 독자적인 영역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감각을 인정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입각한 아퀴나스는 이성의 자율적인 부분을 인정하였다. 동시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하듯이,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의 계시에 대해서는 조명설을 지지하였다. 그는 신학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자연신학과, 믿음을 전제로한 계시신학으로부터 구분하였고, 인간의 감각기관과 이성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이해하는 자연철학을 영역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이성이 억압받던 중세시대(dark age) 로부터 근대적인 사상이 출현하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으며, 유럽에서 자연과학이 급격히 발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첨예하게 대립하던 이성과 신앙은 다시 한번 평화롭게 공존하게 되었다. (다윈의 진화론이 출현하기 전까지.)

 

 


 나의 꿈은 과학의 영역에서 오랫동안 몸을 담는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종교적인 생활과 과학자로서의 생활에서 유발되는 끝없는 내면의 싸움을 견뎌내야 한다는 사실에 꽤나 우울해 있었고, 자신이 없기도 했었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너무나도 큰 선물이었다. 내가 앞으로 가져야 할 학문적 태도와, 신앙적 태도가 첨예하게 대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같이 갈 수 있는 관계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마음의 커다란 부담을 덜어내게 되었다. 그럼 왜 나는 종교를 포기하면 되는 것을 왜 굳이 부담을 가지고 사는 것인가?

 

 사람의 행복은 물질적 풍족이나, 지적인 충만함, 혹은 사회적 지위로서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고 난 믿는다. 멀지 않은 사람들의 예를 보면 그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달리고 넘어지면서, 행복의 실마리를 잡기위해 애쓴다. 하지만 매번 그 실패에 좌절하곤 한다. 그리고 행복은 점점 멀게만 느껴지고, 사람들은 점점 단순한 쾌락을 행복으로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을 주위에서 많이 보면서 이런 저런 행복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니, 가장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살펴보게 되었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참 된) 종교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는 온갖 욕을 먹고 살지만 (욕먹을 짓을 하는 사람들이 많긴 하다) 헛된 욕심을 쫓아서 사는 이들보다 훨씬 행복해 보이기에, 나는 신앙심을 키우기 위해 지속적으로 애쓰고 있다.

 

 

아마도 이 책과의 만남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계시" 일지도 모른다.

 

 

 

ps.
 책은  크게 4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책의 내용으로 초대하는 1장, 두 큰 사상가들을 소개하고 연관시키는 2장, (두번째 장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과, 아퀴나스의 생각을 각각 나누어 설명한다. 각각의 인물의 학문적 성장의 배경을 설명하고, 시대적 상황을 조명한 다음, 본격적으로 그들의 사상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 그리고 데카르트의 가상 토크가 있는 3장, 그리고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많이 인구에 회자되는 이슈들을 책의 내용에 입각해 정리해 놓은 4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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